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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문을 박차고 나온 지 40일 정도 된 것 같은데, 벌써 그 때의 내가 멀게 느껴진다. 일상은 그대로다. 아침에 일어나서, 생전 안먹던 아침도 먹고 집안일도 해가며 공부 중이다. 가끔은 새로운 악상도 떠오르고, 누군가 음악하는 모습을 보며 못내 부럽기도 하지만 난 이미 그런 삶을 살아봤기에, 조용히 털어내고 살아가는 중이다. 인연이 닿는다면 또 다른 기회가 있겠지.
나의 오만함에 대해
최근에 친구들과 스키장에 갔다가 좀 다쳤다. 옛날에 스키랑 보드를 타보긴 했는데, 너무 과거의 기억이라 미화됐던 것 같다. 아님 내가 너무 오만했거나. 보호구 같은 것들도 다른 친구들이 안차니까 나도 괜히 안차고, 보드를 배울 때도 강사 출신인 친구가 나를 가르쳐주느라 본인은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서 대충 대충 배우고 탔다. 결국 무리한 코스를 타다가 똑같은 자세로 두 번을 넘어져 응급실에 갔다 왔다. 이후 하루 이틀은 아무렇지 않아서 괜찮겠거니 했는데 오히려 며칠 지나서부터 통증이 심해져서 병원에 왔다 갔다 하는 중이다.
처음 다쳤을 때, 친구들도 여자친구도 나의 잘못에 대해 지적했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 나는 '이게 다쳤다는 사람한테 할 말인가?'하고 굉장히 억울하게 느껴졌다. 예전이었으면 바로 수긍했을텐데. 나의 오만하고 나약한 마음에 대해 다시금 상기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아픈건 진짜니까 지나친 언사는 자제 바란다)
돌이켜보면 난 항상 오만한 면이 있던 것 같다. 오랜 시간 나를 지켜본 형, 동생도 항상 그런 걸 주의해야된다고 말하기도 했고, 내 오만함과 자존심 때문에 남들보다 몇 배는 괜히 어렵게 산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이 항상 나에게 '너라면 잘 할거야', '넌 똑똑하니까', '일 잘하니까', '성실 하니까' 이런 말들을 해줄 때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
그렇게 쌓은 오만의 탑은, 늘 무너질 때 큰 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마치 껍데기 뿐인 것처럼.
이번에 공부를 할 때도 그런 면이 많았던 것 같다. 어떤 개념이 단박에 이해가 안되면 화부터 났다. 강사가 못 가르친다고 하며 짜증을 내고 넘어갔던 부분들은 결국 잊어버려서 다시 찾아봐야했다. 그렇게 여러 언어들을 겉다리로 배우다가 최근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있는데, 처음으로 누군가의 도움없이 문제를 풀어봤다. 쾌감도 쾌감이지만 동시에 여러 생각이 오갔다. 그간 내가 공부했던 것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할 시험이나 방법이 없었던 터라 답답했는데, 이번에는 배운 것을 활용해서 문제를 풀어보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여태까지는 가르치는 사람은 둘째치고, 내 마음이 아직 배울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덕분에 요즘엔 집중도 잘되고,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것 같다.
오랜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저녁에 머리를 싸매며 문제를 풀고 있는데, 인스타를 통해 오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 친구는 군대 훈련소에서 만났는데, 처음 훈련소에 들어가서 일주일 정도만 같이 지내고, 이후에는 다른 소대로 흩어져서 볼 수 없었던 친구였다. 그래도 군대에 있을 땐 페이스북을 통해 간간히 연락했던 기억이 난다. 비록 같이 있던 시간은 일주일 남짓 이지만, 힘든 순간에 만난 친구라 그런지 유독 애틋한 면이 있다.
반갑게 전화를 걸자마자 친구가 의외의 얘기를 했다. "나도 개발자야. 이번에 취직해서 서울로 올라왔어." 인생이 이렇게 아이러니하구나 싶었다. 짧더라도 인연의 끈은 결국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한다. 사실 이 친구는 간간히 내 음악도 듣고 있었고, 바뀐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용케 찾아서 먼저 연락을 해주었다. 나는 못난 사람이지만 정말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구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친구의 조언 덕분에 새로운 길도 보이는 것 같다. 희망을 끈을 붙잡고, 조금씩 나아가는 기분이 든다.
오만한 나에게도 여전히
인연이라는 것은 참 신기한 것이다. 몇 년을 만나고 대화를 나눴던 사람도 단 한순간 남이 되기도 하고, 살면서 아주 짧은 순간 만났던 인연이 나중에 큰 인연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런 인연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노력하고 주변 사람한테도 두루두루 잘하는데, 그런 모습이 부럽다가도 역시 나에게 그런 재능은 없다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그래도 다가오는 인연을 겸손한 마음으로 기쁘게 맞이하고, 멀어지는 인연에는 담담해지는 법을 배우면 지금처럼 멋진 인연들이 자연스레 내 곁에 있겠지.
최근에 안경을 맞출 때가 돼서 안경사가 된 내 오랜 친구에게 안경을 맞췄다. 때마침 아버지도 바꿀 때가 돼서 나란히 친구 가게에서 안경을 맞추게 되었다. 덕분에 좋은 가격에 안경도 맞추고, 아버지에게 멋지게 친구 자랑도 하게 되어서 내심 좋았다. 이또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런 인연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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